이런 상상을 해 봤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보니 IoT 전시회에 와 주십사 하는 사전 안내 메일이 와 있었다고 합시다. 메일의 링크를 클릭해서 신원 확인을 위한 이름, 이메일, 회사, 직급, 직무 등의 정보와 평소 IoT에 관련한 몇 가지 관심사에 대한 간단한 설문에 답한 후, ‘무사히 사전 등록되었습니다’ 라는 상투적인 멘트를 보겠죠. 자주 쓰는 스케줄 관리 어플에 일정 등록까지 마무리하게 되면, 오늘 아침의 이 일은 곧 잊혀지고 말겁니다. 아주 전형적인 아침의 모습인 데다가,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거든요.
QR 코드를 찍어 전시회 관람객을 위한 어플을 설치해서 사전 등록할 때 썼던 이메일로 로그인하면, 전시회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전시회장 안에서 기념품도 준다고 하니 설치 해 보기로 합니다. 3분 정도 지나 드디어 귀찮은 어플 설치를 마치고 전시회장 안으로 입장합니다.
넓은 전시실에 빼곡히 들어 차 있는 전시 부스를 보는 순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오늘도 그냥 발품이나 팔다가 돌아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립니다. 아까 입구에서 설치한 어플이 알림을 보내는 거죠.
전시회 어플은 현재 나의 위치와 함께 (사전 등록할 때 설문에 응답했던) 내 관심 주제를 다루는 전시 부스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게다가 나랑 비슷한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이 다녀간 전시 부스의 위치와, 동종 업체나 비슷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들렀던 부스들도 알기 쉽게 구분해서 알려줍니다. 부스 앞에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에 대한 정보도 같이 표시해주니까, 전시물에 대한 관심의 정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시 부스를 터치하면 전시 업체와 제품에 대한 정보페이지로 링크되는 건 물론이고, 같이 참여한 유관 업체의 정보까지 같이 표시되니까 한번에 참 알뜰하게 경제적으로 관람하게 된다는 기분이 들게됩니다.
그럴 듯 한가요? 위의 글은 그저 제 상상일 뿐이지만 IoT, 매쉬업, 빅데이터 분석, 머신러닝등의 고급진 기술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 아니라, 그저 ‘실제로 하지않은 일’ 일 뿐입니다. 요즘에야 저런 일들은 이 분야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인거죠.
제 생각엔, 바로 이게 문젭니다. 네. IoT 업체들끼리 모아놓은 전시회라도 저런 서비스를 누릴 수 있을거란 걸 기대하긴 쉽지 않아요.
아쉽지만 최근에 참석한 IoT 전시회의 실상은 말입니다…
사전등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에 걸 표찰을 받기 위해 10여분을 줄을 서서 기다리고요.
바로 이겁니다. 표찰. 알 수 없는 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혹시 이 카드가 제 부스 방문정보를 기록하는 RFID나 비콘 장치였을까요? 뭐에 쓰였는지는 모르지만 진행하시는 분들이 ‘나갈때 명찰을 꼭 반납 해 주세요~!’를 하루종일 피터져라 외치게 만든 주인공 이었던 건 확실합니다.
제 느낌일지는 모르지만, IoT 전시회는 지난 몇 년간 규모만 커졌다 작아졌다 할 뿐, 거의 변한 게 없어 보입니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이런저런 센서와 스캐닝 장비들, 안테나, 신호 수집장치, 변환장치들이 전시되고, 저마다의 많은 ‘플랫폼’ 들이 선보였습니다.
지난해의 이맘때는 스마트한 물고기 양식장을 봤는데, 이번에도 스마트 농장이 나왔구요.
작물의 상태는 그다지 스마트하게 보살핌 받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전시품이라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냥 기분탓이겠죠.
KT, LG, SK 통신3사는 꾸준히 IoT를 접목한 ‘물건’의 가짓수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LTE 망 위에서 누릴 수 있는 스마트한 창문, 전등, 보일러, 거울, 심지어 개 밥그릇까지…
분명 언젠가는 우리 삶을 바꿔놓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그냥 문단속 잘 하고, 힘들지만 내 손으로 전기도 끄고, 개 밥도 주고… 그렇게 살아야죠.
여기저기 발표되는 내용들을 보면, 지금의 IoT 정세는 이렇다 할 성공 사례가 없는 상황에서도 삼성, 애플, 구글, 인텔, 퀄컴은 물론이고 LG, SK등 많은 국내/외 대기업들이 IoT 플랫폼 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모양새 입니다 (참고기사 – 삼성?인텔-퀄컴-구글 IoT 연결 플랫폼 표준 경쟁 가열. 2015.11.9, 전자신문).
모두가 ‘기계가 인터넷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데 힘을쓰고 있지요. 누가 이길지는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그들끼리의 싸움입니다.
어쨌든 하드웨어 스펙이나 통신 프로토콜을 선점해서 생태계를 먼저 만든 쪽이 분명히 유리한 입장일 테니, 그만한 덩치의 기업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건 당연하리라 생각됩니다만. 이런 IoT 전시회에서의 뜬금없는 홍보전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좀 부족하고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가끔 뭔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도 좀 들고요.
ㅣ 활을 쏘아 구에 그려진 움직이는 아이콘을 맞추면 상품을 줍니다.
IoT 전시회 답게 활에는 물론 화살 대신 가상의 화살인 스마트 디바이스가 달려있죠.
전시회를 관람하고 나서 ‘그래서 IoT가 뭐라는 건데?’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분명 IoT는 ‘Internet of Things’ 를 의미하고 있는 건데요.
IoT의 수혜자는 물론 ‘인간’ 이어야 하겠지만, 사물이 인터넷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물-사람-사물 의 인터넷을 이야기 하는 건 아닐겁니다. 사물들 끼리의 소통에 인간이 반드시 끼어들어야 한다면, 거기에는 ‘인간과 소통 가능한 좀 더 똑똑한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물끼리의 소통은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더 나은 가치를 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 가치는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누리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게 될거라는 것이 IoT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요.
결국 IoT의 핵심은 스마트한 기계가 아니라 (안됐지만, 다소 멍청하더라도) 간단하게 통신이 가능한 기계장치들이 주고받는 데이터를 ‘가치있는 정보로 만드는 똑똑한 서비스’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IoT 전시장에는 최신의 흐름에 따르는 기계장치들보다는, 인류문명을 가꾸고 새 가치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들이 즐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런 부분이 강조되지 못한 것 같아 좀 아쉬웠습니다.
누군가 기존의 창문을 (말을 알아듣고, 핸드폰으로 제어가 되는) 스마트한 창문으로 바꾸는 것을 IoT 트랜드로 만들 수 있다면, 기존의 ‘창문’을 IoT가 가능한 ‘기계장치’로 만들어 파는 사람은 돈을 벌겁니다. 안방 창문, 거실 창문과 내 핸드폰이 서로 통신할 수 있게 해 주는 플랫폼을 만든 사람도 돈을 벌겠죠. 어쩌면 이런 것들이 머지않아 아파트 분양가격에 기본 옵션으로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IoT 투자가 하드웨어 플랫폼 중심이 아니라 모두가 가치를 공유 할 수 있도록 하는 소프트웨어 플랫폼 중심이 된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IoT는 자유로운 상상을 누구나 쉽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하는 것이죠. 블로그 첫머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기술이 없는 상황은 아니니까요.
지금 우리곁에 친숙한 메신저나 SNS를 쓰거나 포털에 게시판을 만들고 클라우드에서 문서를 작성하는 것 처럼 쉽게 IoT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어떤 선구자적인 기업이나 개인이 나와준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블로그 첫머리에 쓴 글과 같은 상상이 그저 상상으로 끝나지는 않을지도 모르죠. 아무튼 내로라는 IoT 업체들이 줄줄이 모여있는 전시회에서라도 제대로 된 IoT 경험을 좀 해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다음번 전시회에서는 기존의 전등이 더 똑똑한 전등이 되고, 기존의 창문이 더 똑똑한 창문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IoT를 경험해 볼 수 있을까요?